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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의 전파][중동][유럽][미국[우리나라] [로이드커피하우스][카페플로리안][카페프로코프][조나단커피하우스] [로이드커피하우스]

I feel pretty 2022. 11. 18.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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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보내시고 계시나요?
ㅎㅎ


시간이 정말 쑈쑝하고 빨리 가네요!
지난 시간 커피의 어원과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았죠?
오늘은 커피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를 나라별로 알아볼게요!
오늘도 향기로운 차 한잔 먼저~~^^

11월9일 로스팅한 원두예요.청사과향을 살려서 성공했다는~~^^
                   커피의 전파
중동지역
[Middle East , 中東]

서남아시아와 북부 아프리카 일대를 아울러 이르는 말. 중근동(中近東)이라고도 한다.
중동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영국에서
동양을 근동(近東)·중동(中東)·극동(極東)으로 구분해서 사용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한다. '근동'은 발칸반도 및 튀르키예 지역에 해당하는 오스만 제국이 위치한 곳을 의미했고, 그곳과 인도 사이의 지역을 '중동', 그리고 오늘날 동아시아 지역을 '극동'으로 명명하였다. 이는 당시의 정치·군사적 필요에 의해 임의로 불려진 명칭으로, 중동이라는 지역의 개념이 명확하게 수립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쳐 점차 여러 나라에서 이 표현을 사용하게 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어 오늘날의 튀르키예 영토로 축소되고 그 영향력이 약해짐에 따라, 근동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줄어들고 중동의 영역은 도리어 확장되어 현재는 튀르키예 지방까지를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연유에서 중동을 '중근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이스라엘 등의
중동 국가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건설된 국가들이다.

출처:네이버지식백과

커피를 '이슬람의 와인'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술을 엄격히 금지하는 이슬람 지역에 술 대신 커피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며 중동지역 중에서도 특히 터키에서 커피가 널리 퍼져나갔다. 초기에는 이집트의 카이로, 아라비아반도의 메카(Mecca), 메디나(Medina) 지역에서 커피가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에 따라 메카에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탄생하였으며, 이를 카베 카네스(Kaveh kanes)라 불렀다.
그 후 오스만 제국의 세림 1세(Selim I.1465-1520)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커피를 접했으며 이후 1517년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에 커피가 알려졌다. 콘스탄티노플에 소개된 커피는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음료가 되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1534년 콘스탄티노플에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유럽[Europ]

커피가 실제로 유럽에 전파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처음으로 커피를 들여온 것은 그 당시 지중해 연안의 중동 지역과 활발한 무역을 하던 베네치아(Venezia) 상인들이라고 한다. 베네치아 무역상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된 커피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커피가 전파된 영국, 프랑스 등에 많은 커피 하우스들이 문을 열었는데 당시 커피하우스는 문화교류, 사교, 정치적 토론 등의 장소로 사랑받았으며 남성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는 1645년 베네치아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고 전해지나 어디인지 확실하지는 않고

지금까지 자리하고 있는 유명한 "카페 플로리안(Caffe florian)이 1720년 베네치아에 문을 연 이후 지금도 같은 곳에서 영업하고 있다.

카페 플로리안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로 베네치아의 상징 중 하나이다. 플로리아노 프란체스코니 (Floriano Francesconi)1720년 12월 19일에 베네치아의 승리를 뜻하는 알라 베네치아 트리온 판테 (Alla Venezia Trionfante)라는 이름으로 개업했는데, 곧 그의 이름 플로리아노의 베네치아식 이름인 "플로리안"을 따서 개칭하였다.

개업 이후 플로리안은 지금까지 영업을 멈추지 않고 운영을 이어왔고, 베네치아의 상징으로 지역 주민과 관광객이 방문하는 관광명소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 카페는 많은 유명인사들이 방문한 곳으로 유명한데, 카사노바는 당시에 플로리안이 유일하게 여성의 출입이 가능하다는 카페란 점을 이용해 이 카페를 드나들었고, 괴테, 바이런 경, 카를로 골도니, 마르셀 프루스트, 찰스 디킨스 등등 여러 유명인사이 이 카페를 자주 방문했다.

플로리안 프란체스코니의 손자인 발렌티노 프란체스코니 (Valentino Francesconi)가 19세기 초까지 운영을 맡은 후, 그의 아들 안토니오에게까지 카페가 물렸지만, 1858년 빈첸조 포르타 (Vincenzo Porta), 조반니 파르 델리 (Giovanni Pardelli), 피에트로 바 카넬로 (Pietro Baccanello)가 이 카페를 인수하였고 당시 카페는 복구가 어느 정도 필요한 상태였다.

플로리안의 복구를 위하여 로도비코 카 도린(Lodovico Cadorin)가 복원 작업 및 내부 장식을 새로 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당시 복원에 배정된 비용에 대해 세인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초기에 개업했을 때 2개의 방으로 시작한 카페 플로리안은 18세기 중엽 2개의 방을 추가했는데, 이 방들은 각각 저명인사의 방 (Sala degli Uomini Illustri), 원로원의 방 (Sala del Senato), 계절의 방 (Sala degli Stagioni) 혹은 거울의 방 (Sale degli Specchi), 동양의 방 (Sala Orientale) 혹은 중국의 방 (Sala Cinese)로 불린다. 이 중 저명인사의 방 줄리오 카를리니가 그린 카를로 골도니, 마르코 폴로, 티치아노를 비롯한 10명의 저명한 베네치아 인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원로원의 방에는 "국가를 지도하는 진보와 문명"이라는 주제로 예술과 과학의 세계를 그린 패널들로 벽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 방은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시작된 방이다. 계절의 방사계절을 상징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 방은 베네치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식당이라는 뜻의 일 리스토란테 (il ristornate)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19세기에 이 방이 카페의 식당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동양의 방은 극동지방에서 영감을 받은 파 스쿠티가 그린 이국적 여인들과 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20세기 초 추가된 마지막 방인 자유의 방 (Sala Liberty)아치형 천장과 징두리 벽판, 수작업으로 채색한 거울로 장식되어 있다.

1671년 프랑스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마르세유(Marseilles)에 문을 열었고 1686년 파리에 최초의 커피하우스 '카페 프로코프(Caffe de procope)'가
콜 델리( procopio dei coltelli,1651-1721)에 의해 문을 열었으며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사진출처:Semilk
사진출처:Semilk

1650년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유태인 제이콥(Jacob)에 의해 옥스퍼드(Oxford)에 문을 열었다. 2년 후에는 파스콰 로제(Pasqua Rosee)에 의해 런던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 오늘날 세계적인 보험회사의 하나인 [로이드 보험사의 모태]가 되는 커피하우스는 1688년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s,1648-1713)에 의해 문을 열었다. 그 후 커피하우스의 인기가 날로 좋아져 1715년에 런던에는 2000여 개의 커피 하우스가 성업을 이루었다.

당시 영국에서 거의 모든 사업 분야에 걸쳐 난립했던 카페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을 꼽는다면 단연 해상보험업자들이 모인 로이드 커피하우스라고 할 수 있다.

1687년 개업한 로이드 커피하우스에 모인 해상보험업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이드 협회(Lloyd`s Society)를 결성했고, 이 협회는 지금까지 로이드(Lloyd`s of London)로 발전하여 남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험 조직인 이곳은 아직까지도 커피하우스 시절의 로이드를 기억하고 있다. 즉, 로이드는 카페로 시작하여 보험업 자라는 직군의 발달과 전문화 과정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현재에까지 이르는 회사인 것이다.

해상보험과 재보험에 특화된 현재의 로이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보험회사 중 하나이다. 일례로 대부분의 우주선은 로이드에 보험을 들게 되며 몇 년 전 김연아 선수의 다리 부상 보험을 받아준 곳도 로이드였다.

또한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 선수가 우승할 경우 특별 상품을 적용하기로 한 국민은행이 이 사항에 관련해 보험을 걸어둔 곳 역시 로이드이다.

당시의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그야말로 카페에 불과했지만, 사실은 해상보험업자들이 운집한 보험 거래소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에드워드 로이드(Edward Lloyd)가 타워 스트리트에 처음 문을 연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테이블은 커피도 커피이거니와 각종 서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보험을 들고자 찾아온 손님들은 자신이 보험을 들고자 하는 물품과 보험료를 적은 슬릿(Slit)을 테이블에 얹어 놓고 기다렸다. 그러면 이 슬릿을 본 해상보험업자들이 보험의 수익성을 재빠르게 계산한 뒤 그 자리에서 보험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당시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해상보험업자들을 위해 커피를 파는 것 이외에 선착장에서 카페까지 달려와 항상 최신의 해운 소식을 알려주는 러너(runner)를 고용하였다.

러너는 항상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배가 들어오거나 침몰 소식과 같이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카페로 돌아와 정보를 전달했다.

이렇게 카페에 들어온 소식은 카페 한 구석의 키드니(Kidney)라는 직원에 의해 일정한 간격으로 모두에게 반복해서 낭송되었다.

심지어 1696년부터는 자체적으로 해상 정보지인 ‘로이드 뉴스’를 발간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출간 중인 <로이드 리스트(Lloyd`s List)>의 전신이 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로이드의 정보 체계는 매우 큰 효과를 발휘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739년 젠킨스의 귀 전쟁(War of ear of Jenkins)이 발발할 당시의 것이다.

로이드의 정보원에게 수집된 ‘스페인에 의해 젠킨스의 귀가 잘렸다’는 소식은 영국 해군이 이 소식을 입수하기 하루 전에 이미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보험업자들에게 전달된 상태였다.

당시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고 독자적인 연락 체계를 구축한 영국 해군보다도 빠른 정보망은 곧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소식통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렇게 로이드는 커피하우스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해상보험 집단으로서의 기틀을 갖추었다.


또한
런던 증권거래소의 모태, 조나단 커피하우스도 있었다.

1801년에 설립된 런던 증권거래소. 조나단 커피하우스를 효시로 만들어졌다. <출처: (cc) Kaihsu Tai at en.wikipedia.org>
당시 로이드 커피하우스만큼이나 독자적인 위치를 구축하고 있던 카페 중 하나는 주식거래가 이루어지던 조나단 커피하우스였다.

조나단 커피하우스는 당시 이미 실질적인 주식거래소로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의 런던 증권거래소(London Stock Exchange)가 바로 조나단 커피하우스가 위치하던 그 자리에 세워져 있을 정도이다.

왕립 거래소가 그 주변에 각종 상업과 금융 관련 카페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나단 커피하우스 또한 그 주변에 주식 업에 종사하는 중개인, 투자자, 그리고 각종 주식회사의 사무실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조나단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지는 주식거래에서 한몫을 잡기 위한 투자자들이 모이는 카페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조나단 커피하우스가 주식거래소를 대체하게 된 것은 아직 미성숙했던 당시의 주식시장이 갖는 근본적인 한계에 그 원인이 있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주식 그 자체와 주가가 오르내리는 현상 모두가 생소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지불하는 돈은 어디로 가게 되며 주식 가격은 왜 오르고 내리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식거래는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고,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지식과 이해 없이 무작정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다.

1697년 이전까지는 영국의 주식거래도 다른 모든 상업 및 금융 분야와 마찬가지로 왕립 거래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주식시장에 나돌던 수많은 유령 회사들의 주식으로 인한 피해를 비롯하여 전문 투기꾼, 주가조작으로 인한 피해가 점점 늘어나자 정부로서도 더 이상은 그냥 넘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00명 남짓한 공식 주식 중개인을 제외한 모든 주식 중개인을 왕립 거래소에 출입금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갈 곳 잃은 수많은 주식 중개인과 투자자들은 조나단 커피하우스로 몰려들었고, 이곳이 사실상의 주식거래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일개 커피하우스가 신뢰와 전통의 왕립 거래소를 제치고 주식거래의 중심지가 된 이유는 비교적 간단했다. 왕립 거래소에 출입이 가능한, 면허를 보유한 공식 주식 중개인들이 제시하는 거래는 하나같이 안전하고 수익이 높지 않은 거래였다.

조나단 커피하우스도 로이드 커피하우스와 같은 정보원들을 운용하고 있었고, 수많은 정보와 루머들이 커피하우스에 모여들었다. 오늘날 온갖 소문의 근원이 되는 증권가 소식통이 이미 17세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각종 소문들은 주가를 널뛰듯 춤추게 했다. 당시 조나단 커피하우스의 모습을 그린 한 풍자 희곡에는 어느 해운 회사의 주가가 100파운드에서 20파운드로 떨어졌다가 300파운드로 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금 과장된 면이 있지만, 조나단 커피하우스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영국 주식시장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의 주식시장은 당시의 시대 흐름에 맞추어 급격한 변화의 물살을 타게 된다.

물론 17세기부터 영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카페 문화는 사교 모임, 예술 공간, 지식 공유와 토론의 장으로도 다른 어느 나라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랑스에서 꽃 피운 계몽주의의 시작이 영국임을 볼 때 영국의 카페들도 충분히 공론장(Public Sphere)으로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카페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함이곳의 카페가 정치나 문화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카페는 로이드나 조나단 커피하우스처럼 금융의 한 분야를 주관하는 위치로 성장하기도 했으며, 영국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자신이 속한 업계를 발전시키는 장소를 제공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독일에는 1670년 커피가 처음 소개되었으며 1679년 독일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함부르크(Hamburg)에 문을 열었다. 오스트리아에는 1683년 콜 쉬츠 키(Georg Franz Kolschitzky,1640-1694)에 의해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미국[America]

미국은 1668년 커피가 소개되었으며 이후 뉴욕, 필라델피아 같은 동부지역에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1691년에는 미국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거트리지 커피하우스(Gutteridge Coffeehouse)'가 보스턴에 문을 열었고, 1696년에는 뉴욕에 '더 킹스 암스(the king's Arns)'가 문을 열었다. 당시 미국인들은 영국의 식민 지배 영향으로 주로 차를 마셔왔다. 그러나 1773년 차 무역 독점에 반대하며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일으켰고 이후 차 대신 커피 마시는 것을 애국 운동의 일환으로 여겼으며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 커피가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여성과 커피하우스

지금은 여성들이 카페 문화를 더 많이 즐기는 듯하죠. 그러나 과거 커피하우스는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커피하우스에 출입할 수조차 없었죠.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여성 과학자인 에밀리 뒤 샤틀레는 동료 수학자 피에르 루이 모페르튀가 자주 가던 커피하우스에 함께 가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 남장을 했다고 합니다. 남자 옷을 한 벌 해 입고 커피하우스에 유유히 입장한 샤르테는 모페르튀와 자연스레 합석했습니다.

커피하우스 주인은 샤르테가 여자인 것을 눈치챘지만 귀한 손님들을 잃고 싶지 않아 모른 척했다고 합니다. 샤틀레는 남자 옷을 입은 채 그 커피하우스를 계속 드나들 수 있게 됐습니다.

영국에서는 여성들이 집단적으로 커피하우스 문화에 반발하는 청원을 내기도 했습니다. 남편들이 커피하우스에서 마시는 커피와 토론에 빠져서 집에 들어오지 않자 반발하기 시작한 거였죠.

1674년 발표된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청원’에서 여성들은 “커피는 남자들을 빈둥거리게 만들고 돈을 허투루 쓰게 할 뿐 아니라 정력까지 감퇴시킨다”라고 주장합니다.

남성들은 ‘커피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청원에 대한 남성들의 대답’이라는 글을 발표해 “해롭지도 않고 정신을 맑게 하는 이 음료에 왜 화풀이를 하느냐”라고 반박했어요. 여성들이 커피 문화를 향유할 수 없다는 차별성 때문에 반발이 터져 나왔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나라[Korea]

고종황제가 1896년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 머물 때 러시아 공사 베베르(웨베르, Karl Ivanovich Veber,1841-1910)를 통해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고 전해진다.

그 후 고종은 '정관헌(靜觀軒)'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커피를 즐겼다고 하여 당시에는 커피를 서양에서 들여온 국물이라 하여 '양탕국'이라 불렀다.

덕수궁/정관헌
출처:네이버지식백과
출처:네이버지식백과

고종, 아관파천, 손탁호텔, 미스 손탁, 정관헌......

이는 우리나라 근대시기 커피의 전래과정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자주 등장하는 장소와 명칭들이다. 아관파천 때에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커피에 맛을 들인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가까운 손탁호텔의 여주인 미스 손탁(Miss Sontag)을 시켜 커피를 가져오게 하여 일종의 야외 다방인 정관헌에서 이를 즐겼다 하는 그런 얘기들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이 어느 것도 커피의 '첫' 이야기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

커피(coffee)의 우리식 표기로는 가배(, ), 가배차(茶), 카피차, 가피 차(加皮茶), 가비 차 등이 있었다. 이규태의 <개화 백경> (신태양사, 1971)에는 그 시절에 커피를 일컬어 민간에서는 양탕국(洋湯ㅡ)이라고도 불렀다고 적고 있으나, 이에 대한 확실한 고증자료는 없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 등장한 것은 필시 근대 개항기를 전후한 시기의 서양인들에 의한 것일 텐데, 이에 관해서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자료를 찾아내기 어렵다. 다만,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만 그 흔적들을 간신히 찾아낼 수 있을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드러난 자료를 통틀어 가장 그 시기가 빠른 것으로는 영국 외교관 윌리엄 칼스(William Richard Carles, 賈禮士, 加里士; 1848~1929)가 지은 <조선 풍물지(Life in Corea)> (1888)를 지목할 수 있다. 칼스는 1884년 3월 17일부터 1885년 6월 6일까지 인천주재 영국 부영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책에는 그가 영국 부영사로 부임하기에 앞서 1883년 11월에 우리나라를 찾은 때의 일을 적고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커피에 관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 당시 영국 정부는 주중 영국공사인 해리 파크스(Sir Harry Smith Parkes, 巴夏禮; 1828~1885)를 특파하여 전년도에 스스로 비준을 거부한 수호통상조약에 대해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도록 재교섭을 시도하던 상태였다. 이때 우연찮게도 중국에 머물고 있는 칼스 역시 자르딘 매터 슨상사(Messrs. Jardine, Matheson, and Co.)의 동업자인 패트슨(Mr. Paterson)의 제안에 따라 조선의 내륙으로 들어가 광산을 탐사하고자 '개인적으로' 조선을 탐방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차였다. 이리하여 칼스는 파크스 공사 일행에 합류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진 1883년 11월 26일을 전후한 한 달가량의 시간을 이 땅에서 체류하였던 것이다.

"(pp.31~32) 그가 살고 있는 집은 국왕에게서 하사 받은 것이었으며, 지체 높은 사람들이 쓰는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다만 지금까지 우리가 묵었던 집들과는 그 스타일이 똑같은 것이었다. 우리가 안내되어 들어간 구역은 아주 매력적 있으며, 이 도시와 길거리에서 막 목격했던 것들이 있었던 지라 조선에 있는 한 독일인 집의 청결함과 안락함에 대한 감사는 최고조에 달했다. 우리들의 안락함이라는 놈은 이내 훌륭한 목욕과 따뜻한 커피(hot coffee)라는 사치함에 이르게 되고, 이것들도 당연히 고마운 일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독일인이란 흔히 '목 참판(穆參判)'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ellendorf, 穆麟德; 1847~1901)를 가리킨다. 그는 청나라의 북양대신 직 예총 독 이홍장(北洋大臣 直隸總督 李鴻章, 1823~1901)에 의해 조선으로 파견되어 1882년 가을 이후 해관 총세무사(海關 總稅務司)와 아울러 협 판교 섭 통상 사무아문(協辦交涉通商事務衙門)으로 활동하다가 1885년 12월에 해임되어 중국으로 소환을 당한 인물이었다. 그가 우리나라에 머물 때에 사용하던 집은 박동(洞,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일대)에 있던 것으로, 원래 선혜청 당상관(宣惠廳 堂上官) 민겸호(閔謙鎬)의 가옥이었으나 그가 임오군란의 와중에 피살된 이후로는 흉가로 간주되어 빈집이었다가 묄렌도르프에게 하사된 내력을 지녔다. 이 집은 나중에 독일 영사관을 거쳐 육영공원과 관립 법어학교 등으로 전환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보듯이 칼스는 1883년 11월에 묄렌도르프의 집에서 '따뜻한 커피'를 얻어마셨다고 하였으므로, 커피 도입의 역사에 있어서 그 선두는 '잠정적으로나마' 묄렌도르프의 몫으로 돌려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흔히 궁중의 음식과 기호품이 서양식으로 바뀐 것은 미스 손탁의 활동과 결부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있으나, 묄렌도르프의 손을 거쳐 궁궐로 커피가 먼저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매우 커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도 손탁보다는 묄렌도르프의 경우가 우리나라에 온 시기가 더 앞선다.

흔히 '언더우드 부인'으로 알려진 릴리아스 호톤 언더우드(Lillias Horton Underwood, 1851~1921)가 남긴 증언도 커피의 전래에 관한 것으로는 비교적 초기의 기록에 속한다. 1889년 3월 14일에 결혼식을 가진 언더우드 내외는 특이하게도 조선 내륙으로 장기간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이들은 평안북도 위원(渭原)에서 커피에 관한 약간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언더우드 여사는 <상투잡이와 더불어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1904)이라는 책을 통해 이곳에서 겪은 일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위원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현감과 그 친구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저녁식사를 마련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의 친절과 호의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고 싶었는데, 야영지와 총각식 요리에 상당한 경험과 능란한 기술을 갖고 있는 언더우드 씨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 일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 우리는 수프, 생선, 화관과 딸기로 장식하고 사과소스를 얹은 다음 감자, 밤, 양파로 속을 채운 매혹적인 작은 구이 돼지 등을 포함하여 여섯 개가량의 코스가 잘 준비된 것에 대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크래커에 마멀레이드를 바른 우리들의 디저트는 최고의 미각을 즐기도록 하기에 충분했으며, 우리는 현감에게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하지 않은 채 벌꿀로 탄 커피를 소개했다.”

이와는 별도로 아관파천에 앞서 이미 궁중에서 커피가 애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저명한 지리학자인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 여사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1897)이다. 여기에는 1895년 초에 그가 왕비를 알현한 때의 얘기를 적고 있는데, 이러한 구절이 눈에 띈다.

노란색 비단이 드리워진 수수한 방으로 안내되자 우리는 곧 정중한 태도로 커피와 케이크를 대접받았으며, 그 후 저녁식사 때는 상궁이 궁중 통역관의 도움을 받아 아주 아름답게 꾸며진 식탁으로 데려갔다. 저녁식사는 놀랍게도 ‘서양식’으로 요리되었으며, 수프를 포함해서 생선, 퀘일, 야생오리와 꿩고기, 속을 채워 말아 만든 쇠고기 요리, 야채, 크림, 설탕에 버무린 호두, 과일, 적포도주와 커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명의 궁녀와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과 함께 식탁에 앉았다. 오랫동안 지체한 후에 우리는 통역관만을 대동하여 조그만 알현실로 안내되었는데, 단상 위에는 한쪽으로 세 개의 진홍색 벨벳 의자 앞에 왕과 왕세자와 왕비가 서 있었고, 언더우드 부인이 나를 소재하자 그들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우리들에게 미리 준비되어 있던 두 개의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이 무렵의 궁궐 음식은 이미 서양식이라고 해서 그것이 하등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서양식 요리가 등장하고 있으며, 간단한 접대용으로도 커피와 다과가 함께 등장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보면 아관파천 때에 커피맛을 들였다고 하는 얘기는 별다른 근거가 없다고 여겨진다.

흔히 '벙커 부인'으로도 익숙한 여의사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 1860~1938)의 회고담에도 궁중에서 커피를 얻어마셨다는 얘기가 나온다.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The Korean Repository)> 1895년 10월호에는 엘러스가 기고한 "나의 첫 왕비 전하 알현"이라는 제목의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명성황후를 첫 대면하여 진찰한 때의 내용이 나오고 그 말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 최근의 알현 때마다 우리는 커다란 궁궐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와서 곧장 대기실의 문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윤허를 받았다. 이곳에 도착하면 차와 커피와 과일이 접대되며, 그러고 나서 좀 더 아담한 전용공간에서 우리를 맞이해주는 왕비 마마에게로 인도되었다. 국왕과 왕세자는 항상 거기에 임어하셨다. 알현한 뒤에는 우리는 곧장 집으로 물러나도록 윤허되었다."

이 무렵 궁중에서 서양식 요리와 커피가 일상화하고 있었음을 잘 나타내 주는 사례는 바로 1898년 9월 11일에 벌어진 김홍륙(金鴻陸)에 의한 '독 차음 모사 건(Coffee Poisoning)'이다.

이 사건은 아관파천 이후 승승장구하던 러시아공사관의 통역관 출신인 김홍륙이 몰락하여 유배지로 가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불만을 품고 하수인 공홍식(孔洪植)으로 하여금 아편 한 봉지를 건네주고 이를 어선(御膳)에 타서 올리도록 사주한 데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에 공홍식은 다시 양식요리 숙수인 김종화(金鍾化)를 통해 일을 벌이도록 하였는데, 그때 마침 가배차(茶)가 부글부글 끓고 있으매 여기에 그것을 집어넣어 황제와 황태자에게 마시도록 올렸던 것이다. 이 사건의 주동자인 김홍륙과 공홍식과 김종화는 모두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졌다.

이 당시 카토 일본공사가 오쿠마 일본 외무대신에게 발송한 기밀 전문(1898.9.25일 자)에는 사건의 내막이 이렇게 요약되어 있다.

"...... 폐하께서는 때때로 즐겨 양식을 찾으시는 일이 있는데 항상 먼저 커피를 찾으시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날 밤에도 역시 전례와 같이 먼저 커피를 드렸는데 커피는 상시로 변하는 것인지 맛이 좋지 않다고 하시면서 아주 소량으로 두세 번 마셨고, 황태자께서는 거의 한 두 번에 반잔을 마셨습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두 분 모두 불쾌함을 느꼈는데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토사 하고 곧이어서 황제께서도 역시 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봉시한 자의 면면은 내시 7명, 여관 3명, 별입시 1명으로 그중 남은 커피를 마신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중독되어, 이로써 그 해독이 음식물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궁중 사람이 아닌 일반인들에 의해 커피를 마시는 일이 자연스레 받아들여진 때는 도대체 언제쯤이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변을 찾아내기는 어려우나, 몇 가지 단서는 찾아낼 수 있다. 가령 <독립신문> 1896년 10월 8일 자에 수록된 '고살키상점'의 영문 광고에는 "모카커피(Moka Coffee)", "자바 커피(Java Coffee)"가 수입품으로 등장한다. 이것으로 보면 적어도 이 시기에 이르러 커피라는 존재는 이미 일부 계층의 독점물이거나 전유품의 단계를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영문판 독립신문인 <더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 1899년 8월 31일 자에 수록된 광고에 윤룡 주라는 사람이 청량리 홍릉 앞에 서양식 요리점을 개업하였다는 내용 가운데 "...... 홍차, 커피, 코코아 등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또한 <황성신문> 1900년 11월 26일 자에 수록된 광고를 보면, "송교 청향관(松橋 淸香館) 가피 차(加皮茶) 파는 집에서 진 요리(眞料理)를 염가(廉價)로 정결(精潔) 히 하오니 첨 군자(僉君子)는 왕림 시상(枉臨試嘗)하시오. 송교 청향관 고백(松橋 淸香館 告白)"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가피 차'는 곧 '커피차'이다. 이것을 일컬어 커피의 대중화라고 단언하기는 섣부르지만, 적어도 일반인에 대한 커피의 보급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 커피의 전파와 보급에 관한 참고자료를 살펴보건대, 대개 손탁의 역할과 손탁호텔의 존재에다 이를 결부하여 설명하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실상 커피는 손탁과 손탁호텔과는 무관하게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이 땅에 전래되었으며, 또한 생각보다는 매우 이르게 이미 우리네의 일상생활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바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우리나라는 6.25로 인해 주둔하게 된 미군의 군수 보급품을 통해 인스턴트커피가 시중에 유통되면서 일반인도 커피를 접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인스턴스 커피 소비가 기형적으로 많은 나라가 되었다.



오늘은 세계 여러 나라별 커피가 즨파된 경로를 살펴보았는데요!

작고 귀여운 빨강 체리 커피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정말 많은 일들을 해냈다는 게 놀라울 뿐이네요!


오늘도 길고 지루할 수 있는 내용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에는 커피의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볼게요.

건강 조심하세요ㅎㅎ


늦가을 낙엽속으로~~^^

일부 내용 출처:새롭게 공부하려고 추천받아 산 책이에요!
"all new 커피 인사이드"
커피에 대한 모든 게 상세하게 들어있는~~^^
독서에 취미가 있는 분들께 커피를 시작하시는 분들께 추척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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